
![[동화론파_모쨔_코마에다 나기토X히나타 하지메].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198f43_3e18fbc43fec4c91b12c9e2dfaa33711~mv2.png/v1/fill/w_600,h_225,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5B%EB%8F%99%ED%99%94%EB%A1%A0%ED%8C%8C_%EB%AA%A8%EC%A8%94_%EC%BD%94%EB%A7%88%EC%97%90%EB%8B%A4%20%EB%82%98%EA%B8%B0%ED%86%A0X%ED%9E%88%EB%82%98%ED%83%80%20%ED%95%98%EC%A7%80%EB%A9%94%5D.png)
귓가에 희미하게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바람에 부대껴 사부작거리며 제 존재를 알리는 이파리, 그리고 바다 내음. 오전부터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모래알갱이가 등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자 감겨있던 눈이 절로 뜨인다.
“...읏.”
눈꺼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맨눈으로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나는 오랫동안 여기에 잠들어 있었던 거겠지. 눈부심을 적응하기 위해서, 팔로 햇빛을 적당히 가린 뒤 눈을 감았다 뜨길 수차례 반복한다.
30초, 40초, 적당한 시간이 흐르자 주변의 것들이 하나둘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제와는 달리, 한없이 높고 푸르고 청초한 하늘이다.
납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우곤, 미세하게 잘린 기억들을 곰곰이 떠올려본다. 나는 왜 해변에 홀로 쓰러져 있었던 것인지, 왜 몸 구석구석이 근육통이라도 난 것처럼 쓰라리고 아픈지, 또 희미하게 들렸던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지.
잿빛 구름이 끝없이 펼쳐진 넓고 우중충한 하늘.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차게 쏟아져 내리던 비. 해일같이 크게 출렁이는 파도와, 그런 바다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평소 헤엄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팔을 아무리 휘저어 봐도 그 괴물 같은 파도 앞에선 연약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다. 눈과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은 가히 고문이라고 부를 만큼 따갑고 괴로웠지만, 이것 또한 나의 운명이라면. 그러한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발버둥을 멈추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물속에서 차갑게 문드러져야할 몸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바다에 빠졌을 당시 주위엔 아무도 없었을 뿐더러, 만약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이 수영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차라리 파도가 제 몸을 육지까지 이끌어줬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에게는 기적에 가깝지만.
“...”
자신이 어떻게 살아있냐는 수수께끼는 잠시 뒤로하고, 멍하니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어제는 그렇게도 검고, 지옥 같아 보이던 것이 지금은 이토록 평화로워 보인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넋을 놓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깼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즈음, 등 뒤에서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나에기 군. 날 찾으러 와 준 거야?”
“응. 어제는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려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는 생수 한 병을 나에게 건네주며, 찾아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가 나를 구해줬을지도 모른다. 이 장소는 나에기 군과 자신만 알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기 군은 어릴 적부터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겉돌고 있던 나를 부모 같은 마음으로 보살펴 준 다정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와는 사소한 비밀까지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나는 옛날부터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그래, 나에게 있어서 나에기 군은 ‘희망’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무슨 소리야?”
“어제 말이야. 아침부터 태풍이 올 거라고 떠들썩했잖아. 넌 그걸 알고도 여기로 온 거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나에기 군은 나를 추궁하는 말투로 캐물었다. 하지만 크게 나무랄 마음은 없었는지, 나에기 군 특유의 상냥함이 묻어 나왔다. 그는 내 사상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맞아.”
“...이번엔 왜?”
“시험해보고 싶었거든.”
“뭘?”
“내 행운을.”
“.......”
나에기 군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그의 침묵을 더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바다에 뛰어든 거야?”
“맞아, 그리고 놀랍게도 성공했지. 행운은 정말로 내 재능이 맞았던 거야! 다른 녀석들은 내 재능을 믿지 않았지만 이것 봐, 나에기 군. 나는 멋지게 증명해냈잖아? 아무도 없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도 절벽에서 떨어져 살아남을 확률이!”
“코마에다 군... 그게 정말 목숨을 걸 정도로 의미 있는 행동이야?”
“당연하지. 왜냐면 난, 그런 일에라도 목숨이라도 쓰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니까. 나에기 군도 잘 알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쓸데없이 살아 숨 쉬며 공기만 축내는, 쓰레기 같고 저열하고 한심한 인간이라는 걸. 아, 맞아. 그래도 나에기 군에게는 감사해야지.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저 차디찬 바다 깊은 곳에서 물고기 밥이 됐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뭐, 기껏 목숨 걸고 건져 올린 게 나 같은 쓰레기라서 미안하긴 하지만... 역시 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 톨 만큼의 가능성이 있다면 저 죽음의 바다정도야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희망적인 존재야!”
“..그건 틀렸어, 코마에다 군.”
줄줄이 늘어놓는 영양가 없는 말을 단칼같이 끊어낸 나에기 군은 이어서 자신의 얘길 덤덤하게 이어나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뒤늦게 내가 사라진 걸 알아챈 나에기 군은 마을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내 행방을 물어보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몰래 바닷가로 나온 내 행방을 그들은 당연히 알 리가 없었으며, 나에기 군은 옆 동네, 심지어는 옆 옆 동네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난 장소가 바로 여기. 아니, 사실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꽤 오랜 시간 부정했다고 나에기 군은 말했다.
그렇게 비가 그치고 동이 틀 무렵, 해변에 도착해 날 찾아다니던 나에기 군은 내가 바다에 휩쓸려 죽은 건 아닌지, 자신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구할 수 있었음에도 못 구하게 된 건 아닌지,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을 때쯤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에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 하반신이 물고기처럼 생긴 소년이 있었다는데, 나는 잠시 동안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응, 코마에다 군이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그야 하반신이 물고기처럼 생긴 사람이라니, 동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잖아.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히 내게 이렇게 말했어.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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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기 군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나와 그가 말했던 존재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루는 나무 그늘 아래서, 또 하루는 큰 바위에 앉아서, 또 또 하루는 그 날처럼 모래사장에 누워서. 한 달, 두 달, 자그마치 6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해변에 가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곳은 아무도 발걸음을 하지 않는 외딴 섬 같은 곳처럼 남아 있었다.
늘 그랬듯 차갑게 식은 모래사장 위에 누워, 눈을 감고 그 날을 떠올린다.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바람에 부대껴 사부작거리며 제 존재를 알리는 이파리, 그리고 바다 내음. 물에서 천천히 의식을 놓아버린 날 포기하지 않고 구해준 그 자상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러다 서서히 잠이 들곤 한다. 꿈에서 만큼은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
“―다, 들려?”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하고도 낯선, 내가 잊고 있었던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햇볕 같은 따스함이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힘겹게 입을 연다.
“...늦었잖아, 히나타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