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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론파_담향_고쿠하라 곤타X이루마 미우].png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로 싸락눈이 펄펄 휘날렸다. 날카로운 가지에 걸려 쌓이기 시작한 눈이 얼마 안 가 바람에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움턱 떨어졌다. 눈이 그칠 줄 모르고 쌓이는 땅바닥 위로 기름 타는 냄새를 풍기는 랜턴이 빛을 내려놓았다. 랜턴의 손잡이 끝을 잡은 남자가 눈앞의 눈더미를 바라보았다. 눈더미 위로 나무 잔해와 톱니바퀴 조각들이 머리꼭지만 내놓고 있었다.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르겠네. 이래서야..”

“이루마 녀석의 것은 확실한 데 말이야.”

 

털옷을 꽉꽉 껴입은 남자가 한숨을 쉬며 눈더미를 발로 찼다. 밀도 있게 꽉꽉 뭉친 눈더미 위로 금방 지워질 발자국이 남았다.

 

“이 위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맹수에게라도 당했나?”

“..재수가 없으려니 원. 빨리 가자고. 이 근처엔 야수가 산다는 소문도 있어.”

 

남자들이 눈발이 휘날리는 설원 위를 푹푹 걸어가며 말했다. 야수? 그래, 애들 밤 잠 설칠 때 말해주는 동화있잖냐. 그들의 말소리가 눈보라 소리에 서서히 묻혀갔다. 발자국 위로 새로운 눈이 쌓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이 덮여갔다.

 

그리고 그 위로, 용케도 눈보라를 견디던 흰 새가 푸드덕 남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이 낡은 고성에서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이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가 유일했다. 이루마는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에 인상을 쓰며 이불 사이로 파고들었다. 선선하고 싸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루마양, 조금 더 자도 돼. 환기를 좀 시키려고.”

“..아-... 그래..”

 

장막처럼 햇빛을 거르는 눈꺼풀 새로 너른 등이 보였다. 창문을 열고 겨울 공기를 정면으로 맞이하던 거대한 남자가 팔을 반쯤 들어올렸다. 새소리가 들렸다.

 

“아, 하얀새씨. 응, 응.. 그래? 고마워.”

 

또 조그만 새와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루마가 찬 공기를 피해 두터운 솜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적당히 차가운 공기 안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는 것이 은근 기분 좋았다.

 

그가 방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빗자루를 들고 가벼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매일의 일과가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 강하지 않은 새벽의 빛을 구경하고 방을 청소했다. 이루마는 마치 해변가를 기어오르는 파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몸을 뒤척였다.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 남자가 부산스럽게 솜을 꽉꽉 기워준 이불이 이루마를 감쌌다.

 

남자는 청소를 다 한 후 창을 닫았다. 하나하나 창을 닫던 그가 해가 둥글고 밝게 떠오르기 시작한 바깥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햇빛 줄기를 짙은 속눈썹 밑 동공에 받아 담던 그의 머리에서, 빠득, 하고,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렸다.

 

“..대물, 너 변하고 있어.”

“응, 미안해. 곤타 때문에 잠 깼어?”

 

곤타가 창을 닫았다. 얇은 천이 붙은 창이 닫히자 방은 한 층 어두워졌다. 이루마가 눈을 뜨자 거대하고 날카로운 뿔이 자라난 그의 머리가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뿔은 산양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물소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곤타가 자신의 손으로 제 머리에 돋은 뿔을 쓰다듬었다. 그 손에도 인간의 것보다 더 두텁고 긴 손톱과 단단하고 질긴 털이 나있었다.

 

햇빛이 걸러져 엷게나마 스며드는 방 안에서 다시 뼈가 우드득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곤타의 머리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뿔이 스스로 곤타의 머리 속으로 우그러져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루마는 그다지 볼 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순박한 남자의 모양새가 된 곤타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미안. 이루마양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은 데.. 햇빛이 너무 예뻐서.”

 

햇살에게 미움 받는 주제에 그것처럼 웃는 곤타가 이상해서 이루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행동에 이루마가 화났다고 생각했는지 곤타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맞아, 이루마양. 그러고 보니 하얀새씨가 소식을 하나 물어줬어. 마을 사람들이 이루마양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이루마가 푹신한 이불 바깥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피부 위로 찬 공기가 내리 앉았지만 의외의 소식에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들이 나를 찾고 있지? 물론 이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꽉 찬 황금 뇌세포의 소유자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겠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괴짜 취급했다. 요 일전에도 나름 신경을 써서 가벼운 증기기계를 만들어줬더니 구석에 처박혔던게 눈에 선했다.

 

“흥, 절세미녀인 이 몸이 사라졌으니 마음껏 애간장이나 태우라지! 대물! 이 몸을 모시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곤타가 그 말에 헤헤 웃었다. 암, 당연히 이 몸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기뻐해야지. 이루마가 약간은 상쾌해진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곤타가 침대 밑에 토끼털로 만들어진 슬리퍼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맨발을 슬리퍼 사이에 끼워넣으니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루마가 내밀어진 곤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마치 공주가 되어 하인에게 시중이라도 받는 꼴이었다.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어색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곤타는 서재를 정리하고 있을게!”

 

곤타가 옷장으로 다가가는 이루마를 보다가 서투른 변명을 외치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우당탕퉁탕 소리를 요란히 내며 나가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 몸의 벗은 몸이 상상되기라도 했나보지? 이루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옷장을 열면 고풍스러운 옷이 가득했다. 분명 곤타가 입었을 리는 없는 고급스러운 드레스도 있었다. 이루마가 격식을 차린 옷을 옆으로 쭉 밀어냈다. 불편하기만 한 옷이었다. 역시 입을 만한 옷이라면 순진한 대물 녀석을 홀릴 노출에 활동하기 편한 옷이지! 이루마가 거대한 옷장에 몸을 밀어 넣을 듯이 굴며 손을 움직였다. 옛날 인간들은 전통에 뇌가 굳어 불편하게 치렁치렁 달린 옷만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하인의 흰 셔츠와 바지를 양 손에 든 이루마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뭐, 이 천재 미소녀에게 옷을 섹시하게 만드는 일은 간단하지만! 이루마가 씨익 웃고는 여기저기에 흩어진 연장들을 꺼내들었다. 이곳에 온 첫 날 곤타를 탈탈 털어 겨우 얻어낸 오래된 장비들이었다.

 

*

곤타는 이루마가 발명이란 작업을 할 때 즈음에야 정원에 나가곤 했다. 해가 약간 기울어질 때에 빛을 받아 싱그럽게 반짝이는 꽃과 잎들은 그의 눈에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웠다. 비록 눈송이가 잔뜩 쌓여 차갑게 얼어있어도 그랬다. 곤타가 손을 뻗어 붉은 꽃잎을 피워낸 장미를 손으로 쓸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자라난 꽃님이라면 이루마양에게 주어도 괜찮겠는 걸. 기뻐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곤타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꺾어 소중하게 손에 들었다. 꽃을 쥔 손에 난 두껍고 날카로운 손톱이 흉했다. 아까 두개골 안에서 빠득, 빠득 뼈가 자라나는 소리가 들렸으니 커다란 뿔도 머리에 나있을 터였다. 곤타가 빈손을 들어 머리에 나있는 뿔을 잡았다. 언젯적이었더라,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해님이 곤타에게 뿔과 손톱, 그리고 손등과 볼에 자라나는 거친 털을 주었던 게.

 

옛날에, 고성에 사람이 가득했을 때 곤타의 아버지가 요정에게 미움을 받았었다는 이야기만이 곤타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곤타를 요정에게 데려갔던 것도, 오랜만의 만남에 신나선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너무나도 예쁜 요정을 만났었다. 요정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마도 곤타가 해님에게 미움 받았던 게 그 이후인 것 같았다.

 

모두가 죽어갈 동안 곤타는 홀로 이곳에 살았다. 혼자서. 굶어도 죽지 않고, 자지 않아도 죽지 않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저 언젠가 돌아올 고성의 모두를 기다리며 살았다. 이루마를 만났던 것은 그 긴 기다림 중의 어느 날이었다.

 

눈보라가 유난히 거칠고 셌던 날, 위태롭게 좁은 길을 지나가던 마차. 고삐를 쥐어본 적 없는 손이 나귀의 가죽 끈을 벼랑 끝 나뭇가지처럼 붙들고 있었다. 그것이 걱정되어 자라나는 뿔과 털을 무시하고 다가갔던 곤타는, 그곳에서 이루마가-

 

“대물!!”

 

멍하니 회상에 잠긴 곤타의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곤타가 큰 덩치에 맞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들었다. 이루마가 높은 창문가에 몸을 기대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 공기 속으로 손을 뻗어 흔든 이루마가 외쳤다.

 

“또 시시하게 궁상이나 떨고 있냐? 이 몸이 네게 알려줄 게 있으니까 후딱 올라오라고!”

 

이루마가 야심찬 표정으로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들이밀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곤타가 허둥지둥 흉하게 자라난 뿔을 손으로 숨겼다.

 

“으, 응! 곧 올라갈게!”

 

새씨가 말했었지, 이제 마을 사람들이 이루마양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다고. 어쩌면 이제 이루마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애물단지처럼 생각했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마을의 괴짜 소녀가 자신들의 농사일을 얼마나 편하게 해주었는지 이제 막 알아차렸을 테니까. 곤타가 방금까지 이루마가 손을 흔들었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높았다. 곤타가 슬며시 손의 힘을 풀었다. 손 안의 새빨간 꽃송이가 조용히 작은 소리를 내며 땅 위에 흐트러졌다.

 

곤타가 고성의 대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발을 올렸다. 생기 없이 얼어붙은 기둥을 지나 먼지가 이불처럼 쌓여있었던 복도를 지났다. 이루마가 멋대로 매달아놓은 의미불명의 발명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거나 매달려 있었다. 그 눈이 휘날리고 바람이 뺨을 때렸던 날에 이루마는 왜,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 걸까. 곤타의 나쁜 마음에도 불구하고 눈보라는 쉽게 진정되고 겨울 해가 세상을 비추었는데.

 

“이루마양, 곤타야.”

 

곤타가 이루마의 방을 똑똑 노크했다. 그녀의 방은 성의 가장 높은 여인이 쓴다던 탑에 있었다. 곤타가 잠시 하얀새의 말을 전해주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이 벌컥 열렸다.

 

“늦어!”

“미안해,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헹, 그 머리로 생각할 게 있었다고? 대물이 생각하는 것이야 뻔하지! 역시 이 몸을-”

“그, 그보다 이루마양! 뭐라고 걸치는 게 좋겠어!”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이루마의 말을 두터운 외투가 틀어막았다. 곤타의 몸도 넉넉하게 품는 겨울옷이 이루마를 감쌌다.

 

“분명 그 옷은 여기에서 일해 주시던 분들 것일 텐데..”

“아?! 이 천재발명가에게 그런 투박한 옷이 어울리기나 하겠어? 이 몸의 손끝에서 만들어낸 이루마 미우의 발명복과 나이스바디를 보고 감탄이나 하라고!”

 

이루마가 곤타의 외투를 훌렁 털어내곤 제 가슴팍을 통통 두드렸다. 하얀 면 재질의 상의와 편한 갈색의 통넓은 하의가 이루마의 손에 여기저기 잘려 나가 있었다. 통을 줄이거나 불필요하도록 긴 부분을 제거하거나 해서,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하인 복장보다 편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대물! 그 쑥맥 같은 손 치우고..”

“안 돼!!”

 

그 외침과도 같은 소리에 이루마의 손이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깜짝 놀라 후들거리는 다리가 뒤로 한걸음, 두걸음을 걸어 곤타에게서 멀어졌다.

 

“히이, 뭐, 뭐야..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라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곤타가 봐도 되는 거야?”

“..응?”

 

묘했던 긴장감이 툭, 끊어졌다. 이게 또 무슨 구리뇌세포 같은 소리람. 이루마가 방금까지 두려움으로 뭉글거렸던 눈을 날카롭게 펴냈다.

 

“그게, 곤타는.. 그, 남의 몸을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되니까.. 그게 신사라고 배웠어.”

“그래서?”

“응? 응.. 그래서 이루마양은 이제 곧 마을로 돌아 갈 거잖아. 곤타랑 남이니까.. 그, 하얀새씨가 말해줬거든. 이제 마을사람들은 이루마양을 소중히 대해 줄 거야.”

 

곤타가 자신의 손으로 제 얼굴을 부비작거렸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상처 입는 모양새가 꼴사나웠다. 이루마가 두 다리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대물은 혼자서 무슨 되도 않는 소설을 쓰고 있대? 그녀의 등 뒤에는 멍청한 대물 야수를 위해 준비한 이루마의 특제 발명품 설계도가 친절한 설명과 함께 붙어 있었다. 여기서 발명할 때까지는 안 나갈 건데, 이놈은 참나. 이루마가 자신의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확 쓸어 올렸다.

 

“야, 대물!”

“응?”

“이 몸의 계획은 이 몸이 정해! 너 같은 대물이 함부로 할 게 아니라고!”

 

이루마가 손에 든 연장으로 곤타의 단단한 몸을 툭툭 치듯이 건드렸다. 곤타가 손가락 사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느릿하게 감았다. 마치 놀라운 것을 알아챈 듯한 소처럼 멍청하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게다가 내가 그 마을로 돌아간다고? 천만에! 이 몸을 영원히 그리워하며 신으로 모시기라고 하라지! 애초부터 돌아갈 거면 마차를 그렇게 버리고 왔겠냐?”

 

눈 덮인 설원, 바람이 채찍처럼 몸을 휘감은 겨울날에, 마치 곰처럼 등 뒤에 따라붙었던 순한 덩치가 생각났다. 이루마가 그 날처럼 곤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단단한 손을 내리게 했다. 두 눈이 이루마를 향했다가 질끈 감겼다가 다시 천천히 떠졌다.

 

“곤타, 이 몸은 그 날 선택했던 거라고. 영광으로 여겨.”

 

곤타가 울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아주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다가 처음 쓰다듬을 받은 개처럼 구는 모습에 이루마가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웃었다. 그 날, 그 겨울이 극성을 부리던 날에 마차에서 한 마리의 야수를 내려다보던 자신은 어떤 짓을 했더라.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준 직감에 기대어 마차를 버리고 야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뛰어내렸겠지, 아마.

 

이루마가 곤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오랫동안 탑에 갇혀 살았던 어느 동화 속의 공주를 구해준 왕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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